’12세기의 위인’ 살라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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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3년 3월 4일

뉴 밀레니엄을 맞아 타임지에서는 재미있기도 하지만 약간은 건방지기도 한 기획을 하나 했다. 그것은 각 세기의 인물을 선정하는 것이었다. 어디까지나 그들의 잣대로 선정된 인물들인만큼 그를 크게 신뢰할 이유는 없지만 12세기의 인물로 선정된 사람은 오늘과 관련이 있다. 그는 1193년 3월 4일 파란만장한 삶을 마친 위대한 이슬람 군주 살라딘이다. 살라딘은 유럽에서 그를 부르는 이름이고 본명은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라고 한다. 그는 한국군 부대가 파견나가 있기도 했고 오늘 이라크 정부군과 IS가 격돌하고 있는 이라크 북부의 티크리트 출신의 쿠르드족이었다.

Sultan Saladin

요즘 잘 팔리고 있는 시오노 나나미의 책에도 나오지만 십자군 전쟁이 벌어지던 당시 이슬람 세계는 사분오열되어 있었다. 한창 진격해 가던 십자군에게 이집트의 재상이 사신으로 와서 동맹을 맺어 공동의 적(?)을 물리치자는 제안을 할 정도였다. 예루살렘이 십자군에 의해 함락된 이래 수십 년 동안 십자군의 왕국들이 곳곳에 들어섰지만 다마스커스, 알레포, 이집트 등으로 분열된 이슬람 세력들은 통일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아랍 세계에도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기 시작했다. 그 시발은 누르 앗딘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시리아 지역을 장악하고 이집트에도 군대를 보내 아랍 세계의 통일을 도모한다. 누르 앗딘이 보낸 군대의 지휘관에게는 명민해 보이는 조카가 있었다. 지휘관 삼촌은 이집트의 재상이 됐지만 곧 세상을 떠난다. 그 지위와 신분을 물려받은 이가 바로 그 조카, 살라딘이었다. 그는 곧 이집트의 지배자가 된다.

살라딘이 재미있는 것 하나. 그는 가능한 삼촌의 주군이었던 누르 앗딘과의 충돌을 피한다. 누르 앗딘을 배신했다는 말을 듣기는 싫고, 그렇다고 이집트를 바칠 수도 없고…. 살라딘은 그저 피해만 다닌다. ‘그들 만남은 빙글빙글 돌고…..’ 누르앗딘은 예루살렘 왕국을 공격하는 것을 도우라고 명령하지만 살라딘은 거부하고 이에 격노한 누르앗딘은 살라딘을 칠 계획을 세우는 와중에 그만 병사하고 만다. 이제는 살라딘의 시대였다.

시리아와 이집트를 아우르는 강대한 지역을 장악한 살라딘은 다마스커스에 입성하여 누르 앗딘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그 미망인과 결혼한다. (뭐가 존중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하여간 그쪽 풍습은 그런 모양이다) 이후 ‘벼락출세자’ (살라딘의 정적들이 경멸삼아 부르던 별명)에게 펼쳐진 것은 십자군과의 혈투였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의 무대가 되는 시대다. 영화 속에서 나병 환자였으나 현명했던 예루살렘 왕은 보두앵 4세. 살라딘은 그에게 덤벼들었다가 인생 최악의 참패를 당한다. 열 여섯 살 나병환자 국왕은 몽지사르의 계곡에 매복했다가 살라딘을 기습했고, 살라딘은 병력의 9할을 잃고 이집트까지 도망간다.

Kingdom of Heaven

이 참패 후 살라딘은 십자군과의 충돌을 피하고 이슬람 세계를 통합해 나간다. 어떤 광기에 가득찬 인간이 아니었다면 살라딘의 예루살렘 진공은 한참을 미뤄졌을 것이다. 이슬람의 포로 생활을 경험하면서 반이슬람 감정에 한껏 사로잡혀 있던 레이놀드 드 사티용 말이다. 그는 예루살렘 왕 보두앵 4세의 명령을 거부하고 이슬람 대상들을 습격하는 등 도발 행위를 일삼다가 급기야 메카와 메디나, 이슬람의 성지를 공격하여 그 신전의 신성한 돌을 뒤엎어 버리겠다면서 설쳐 댄다. (살라딘의 여동생까지 죽였다고 하는데 이슬람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격노한 살라딘이 대군을 이끌고 레이놀드의 성을 공격하는데 살라딘은 갑자기 병력을 물린다. 그것은 그 성 안에서 레이놀드의 딸이 결혼식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 오늘날에도 신성 모독한 작가에게 사형을 공언하는 무슬림들에게 그 성지를 파괴하겠다는 호언이 무슨 의미였는지를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살라딘은 이슬람 공공의 적에게 관대함을 보여 준 것이다. 이 관대함은 그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후 보두앵 4세가 죽고 후임 왕이 레이놀드와 함께 도발을 감행하자 살라딘은 이를 철저하게 분쇄하고 (하틴의 뿔 전투) 예루살렘을 죄어 들어간다. 그는 이때도 예루살렘 왕 기 드 뤼지낭을 살려 준다.

드디어 예루살렘을 죄어 들어가는 와중에 기사 발리안이 관대한 항복을 청원하자 처음에는 거부했다가 이를 받아들인다. 11세기 말 예루살렘이 기독교도들에게 떨어졌을 때 벌어진 대학살의 재연은 살라딘 덕에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몸값을 일정 부분 받고 기독교도들을 풀어주는 한편 엄중한 호위까지 붙여 준다. 결과적으로 노예로 전락한 이들도 많았지만, 정한 몸값에 모자라는 액수를 받고 방면해 버린 이들이 더 많았다.

“잔혹한 기독교도들은 우리 백성들을 모두 베어버렸는데 , 술탄께서는 왜 그들을 살려보내십니까?”

하고 말했을 때 살라딘은 답했다.

“우리가 마찬가지로 연약한 노인과 과부들을 포함해서 포로들을 모두 베어버린다면 야만적인 기독교도들과 다를것이 무엇인가? 저들과 똑같이 행동한다면 저들과 같은 부류의 인간이 될 뿐이다.”

살라딘은 이후 예루살렘에 십자군으로 온 사자왕 리처드와도 혈투를 벌이고, 서로를 존경하게 된 것으로 이름이 높다. 하지만 그가 가장 위대한 인간임을 증명한 날은 바로 1193년 3월 4일이었다. 리처드 왕과 평화 조약을 맺고 그를 영국으로 돌려 보낸 얼마 후 세상을 떠난 날이었다.

그가 임종하기 전 이슬람 신학자가 옆에서 코란의 구절을 암송해 주었다. “그분은 유일 신이시며 자비와 동정의 신이시라” 라는 코란의 구절에 이르자 살라딘은 “그 말이 맞다” 라고 응답했다. 그리고 “그분을 믿는다”라는 말을 남긴 후 숨을 거둔다. 사망 이후 그의 신민들을 놀라게 한것은 그의 검소함이었다.

그가 남긴 재산은 티루스 디나르 한잎과 은화 47 다르함. 이 돈으로는 장례식도 치룰 수 없었지만 그는 유언으로 자신의 장례식 비용을 백성들에게 부담을 지우지 말라 했다. 결국 십자군을 물리치고 이슬람 세계의 성지를 탈환한 영웅의 장례식을 위해서 그 아들들은 돈을 빌려야 했다.

장례식은 그야말로 검소하게 치러졌다. 성대한 것은 술탄의 죽음에 엎디어 슬퍼하는 백성들의 울음 뿐이었다. 음모도 많고 암살도 횡행했던 이슬람 왕국 정치사에서 그토록 백성들의 비통함과 함께 마지막 길을 갔던 술탄은 살라딘 말고는 없었다.

Ṣalāḥ ad-Dīn Yūsuf ibn Ayyūb

단테의 <신곡> 속에서 살라딘은 헥토르, 아이네아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 기독교도는 아니었으되 보통 사람들과는 차원이 달랐던 위인들이 가는 연옥으로 간다. 시 속에서도 천국에 보내지 않은 것은 기독교인으로서의 아집이었겠으나 적어도 살라딘은 단테에게 소크라테스와 동급이었다. 이슬람의 선지자 무하마드는 지옥에서 배가 갈라진 채 자신의 창자와 배설물을 들여다보는 처지가 되어 있었지만 말이다.

알라의 이름으로 무자비하게 인명을 학살하는 IS를 보면서 살라딘은 아마도 “이 기독교도같은 놈들”이라고 분노할지도 모르겠다. “저 꼬라지는 예루살렘에서 십자군들이 한 짓거리였거늘!” 그러면서 ‘봉은사역’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앙앙대고 있는 동방 귀퉁이의 어느 꼴통 목사들을 보면 이렇게 코웃음을 칠 것 같다. “니들은 또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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