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비극(2) – 사이크스-피코 협정과 밸푸어 선언

Share on FacebookTweet about this on TwitterShare on Google+Share on LinkedIn

사이크스-피코 협정

후세인과 맥 마흔이 서신 왕래를 하는 동안에, 영국은 같은 영토에 대하여 프랑스, 제정 러시아와 비밀 협상을 하고 있었다. 1915년 영국은 중동에서 새로운 공세를 시도하면서, 이 지역에서 경쟁 세력인 프랑스를 안심시킬 필요성을 느꼈다. 이러한 환경에서 1916년 2월 사이크스-피코 협정이 조인되었다. 이 협정은 후세인에게 아랍 국가 건설을 약속한 지역을 영국 영역과 프랑스 영역으로 분할하면서, 팔레스타인 지역을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공동 통치하기로 약속한 것이었다. 사이크스-피코 협정의 내용들은 1917년 12월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 정부에 의해서 폭로되었다.

사이크스-피코 협정의 내용. 팔레스타인 지역은 인터내셔널존으로 지정돼 있었다.

한편 시오니즘의 교조적 존재인 오스트리아 출신 데오도르 허즐은 1903년 4월 영국 재무 장관이었던 챔버레인과의 대담에서 “만일 우리들이 영국기 아래 엘 아리쉬에 갈 때는 우리들의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세력 범위가 될 것이라”라고 제안한다. 영국이 중동에 진출할 때 유대인들이 첨병 역할을 하겠다고 스스로 자처한 것이다. 이때 시오니스트들은 시나이 반도의 엘 아리쉬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집트가 이 계획에 반대하자 영국은 허즐에게 우간다를 제시하였다. 우간다를 지지하던 허즐이 1904년에 죽고 이듬해 열린 1905년의 제7차 시오니스트 회의에서 우간다안은 배격되고 유대인의 민족 향토를 팔레스타인으로 결정하였다. 20세기 초 허즐은 시오니즘 본부를 영국으로 옮겼고, 이미 와이즈만(Dr. Chaim Weizmann, 1874-1952)은 영국인으로서 영국 정계 지도자들인 밸푸어, 로이드 조지, 마크 사이크스 등과 친분관계가 있었으며, 이들은 1917년 무렵 모두 적극적인 시오니즘 지지자가 되었다.

그러나 애스키스, 그레이, 키치너 등의 시오니즘 반대파들은 “30만 영국 내 유대인 중에는 시오니스트는 8,000명 정도에 불과하며 부유한 동화주의자 유대인을 중심으로 한 반시오니즘 세력이 강하게 존재하고 있고, 터키 붕괴 후에 아랍 민족이 전면에 등장할 것”이라는 점 등을 주장하면서 시오니즘에 냉담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와이즈만은 ‘영국 보호 하의 팔레스타인’을 주장하였다. 1916년 영국 외상 밸푸어는 전쟁(1차 세계대전)이 지구전으로 접어들자 팔레스타인이 영국에게 수에즈 운하는 지키는 군사상의 중요한 지점 이상의 것임을 인식하였다. 또 1916년 와이즈만은 시오니스트 요구를 집약한 ‘정책 일정’를 작성하였다. 이 일정은 ‘영국 왕권 하의 유대인의 팔레스타인(Jewish Palestine under British Crown)’이 포함되었다.

영국 외상 밸푸어 선언

이 안은 1917년 로이드 조지 수상, 밸푸어 외상, 초대 팔레스타인 고등판무관 헐버트 사무엘, 미르너, 사이크스 등의 동의를 얻게 되었다. 1917년 7월 17일 이 안을 영국 시오니스트회 의장인 로스 차일드가 밸푸어 외상에게 보냈다. 이것이 밸푸어 선언의 초안이 되었다. 이 안의 요점은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 향토’를 재건한다는 원칙을 승인한다. 영국 정부는 이 목적 달성을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필요한 수단이나 방법에 관해서는 시오니스트 기구와 협의한다”는 것이다.

아서 밸푸어 영국 외상(1848~1930)

사이크스-피코 협정 이후 수에즈 운하의 근접성 때문에 팔레스타인에 주둔한 영국군이 30만 명에 달했다. 또 이집트로부터 오스만 터키 영역인 시리아 지역에 대한 공격을 계획한 탓으로 이 통로에 위치한 팔레스타인 지역은 더욱 중요했다. 때문에 데이빗 로이드 조지(1916-1922 총리 재직)는 ‘팔레스타인은 영국이 되어야 한다’고 결정하였고, 영국군에 의한 정복이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폐기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새로운 영국의 전략은 시오니스트를 영제국 이익 보호를 위한 동맹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영국의 계획은 시오니즘을 비현실적인 꿈으로부터 정당하고 성취될 수 있는 사업으로 변형시켰다. 결국 1917년 11월 영국 외상인 밸푸어의 선언은 앞선 후세인-맥마흔의 약속과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폐기하는 결과를 낳았다.

산레모 협정과 영국의 위임 통치

1919년 7월 시리아 연합의회는 다마스쿠스에서 회합을 갖고 파이잘을 왕으로 하고 팔레스타인을 포함하는 독립 시리아 건국을 선포하고 연합국 측에 승인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 제안에 대해 연합국은 어떤 반응도 내놓지 않는다. 시리아 연합의회는 1920년 3월 파이잘을 왕으로 세우고 시리아의 독립을 일방적으로 선포했다. 비슷한 시기에 이라크에서도 압둘라를 왕으로 하는 독립국가가 선포되었다.

그러나 국제 연맹 위원회는 두 개의 성명을 모두 거부한다. 대신 1920년 4월 25일 이탈리아의 산레모 회의에서 프랑스가 시리아와 레바논을, 영국은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을 각각 위임 통치한다는 지역 분할 통치안을 확정하였다. 이것은 1922년 4월 24일 국제 연맹 이사회의 승인을 받게 되고 영국과 프랑스에 의한 아랍 분할 통치가 실시되었다.

산레모 협정으로 통일 아랍 국가의 건설은 수포로 돌아갔고 영국의 비호를 받은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게 되었다. 팔레스타인 위임통치 협약은 밸푸어 선언을 재확인한 것으로, 영국에게 ‘유대 민족 고향 건설을 보증하도록 요구하면서, 이를 위해서 영국이 적당한 유대인 기관과 협력’하도록 승인하였다. 이 때 시오니스트 조직이 그 특별 기관으로 인정을 받았다.

영국 후원으로 트랜스요르단의 왕좌에 오른 압둘라 이븐 후세인은 통일 아랍국가 건설을 포기하는 데 동의했다.

1921년 3월 영국 식민성 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고위급 회담을 열어 요르단 강과 아까바만을 축으로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 구역을 재분할하였다. 트랜스 요르단이라 불리는 동부를 팔레스타인 판무관의 통치 아래 아랍행정권을 갖는 구역으로 정하고, ‘아미르’로 이름 붙여진 정부를 압둘라에게 할당하였다. 압둘라는 처칠, 헐버트 사무엘, 로렌스 등과 가진 예루살렘 회의에서 아미르국과 영국의 보조금 지급에 대한 보답으로 통일 아랍 국가 건설을 포기하기로 동의하였다. 영국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커다란 전략적인 중요성을 부여하면서, 압둘라 이븐 후세인을 트랜스 요르단의 통치자로 삼고 그에게 매달 보조금을 지급하였던 것이다(계속).

 


 

* 이 글은 2009년 3월 ‘불교평론’에 실린 것으로 저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 원문 보기 http://goo.gl/WxccFb

답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