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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팔레스타인 비극의 뿌리(1) – 후세인 맥마흔 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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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중동의 복잡한 정세는 서구 제국주가 격렬하게 추진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은 인도로 가는 수월한 통상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19세기 후반부터 중동 지역으로 경쟁적으로 진출하였고, 20세기 중반까지 오스만 제국의 영역이었던 이 지역을 분할 지배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서구 열강들은 유력한 가문 출신의 아랍인들을 중심으로 아랍 민족주의 운동이 활성화 되도록 조장하였으며, 아랍 민족주의에 격앙된 아랍인들은 제국주의 국가들에 협력하여 무력으로 오스만 (터키)제국을 물리침으로써 형식상으로는 아랍 왕들이 통치하는 왕정국가를 수립하는 데 성공하였다. 결국 중동 전 지역을 아우르며 지배권을 행사하던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각각의 아랍 국가들로 완전히 분할 해체되었다.

이후 중동 지역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손아귀에서 벗어 날 수 없게 되었으며, 특히 20세기 중반 이후부터 이 지역에서 석유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는 공세적인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불가피한 이해관계 속에서 전개될 수밖에 없다.

1차 세계 대전에 즈음하여 오스만 제국의 붕괴가 예상되는 가운데, 아랍인들 사이에서는 다양한 정치 세력들이 경합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이슬람주의자, 아랍 민족주의자들이 그것들이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이슬람 세계의 전 영토를 통치하는 하나의 정부를 구상하였다.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포함하는 아라비아 반도 전역이 독립 아랍 국가로 대체되기를 원했다.

1차 세계 대전 중에 히자즈의 태수이자, 하심가의 대표인 메카의 샤리프 후세인(Sharif Hussein, 1854-1931)은 알리(Ali), 압둘라(Abdullah ibn Hussein Al Hashimi, 1882-1951), 파이잘(1885-1933)과 함께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반란을 조직하였다. 이 때 영국은 이 반란 부대에 무기, 보급품, 자금 등을 제공하였고, 고문관 등을 파견하면서 이 부대를 직접 지휘하였다.

메카의 샤리프 후세인(1854~1931)

당시 영국은 오스만 제국을 해체시키는 전투에 참가할 아랍 베두인 전사들이 필요하였고, 오스만 제국 해체라는 영국의 목표는 아라비아 반도 지역 패권 장악을 목표로 한 후세인 가문의 이해관계와 일치하였다. 이 때 하심가의 아랍 민족-부족주의는 영국 제국주의와 공동의 목표를 지녔다.

영국의 식민성 장관 처칠, 고등 판무관 헐버트 사무엘, 군사 고문 로렌스와 압둘라는 트랜스 요르단에 아미르 국을 수립하기로 합의하였고 영국은 국가 수립 자금 지원을 약속하였다. 이 과정에서 1920년 압둘라는 2,000명의 부족원들을 이끌고 암만에 주둔하였고, 영국은 요르단강 동안 지역의 베두인 부족들이 압둘라를 통치자로 받아들이도록 설득하였다.

결국 영국이 영향력을 발휘하여 1921년 4월 11일 영국의위임 통치하에서 압둘라 1세의 트랜스 요르단 아미르국이 팔레스타인으로부터 분리 창설되었다. 트랜스 요르단은 1946년 런던 조약으로 영국의 위임 통치로부터 독립을 하면서 왕국이 되었고, 이 때 국가 명칭을 트랜스 요르단 아미르국(the Emirate of Transjordan)으로부터 트랜스요르단 하심 왕국(the Hashemite Kingdom of Transjordan)으로 바꾸었다. 또 이스라엘과의 전쟁의 결과로 요르단강 서안을 합병하고 난 후인 1949년 4월, 국명을 다시 요르단 하심 왕국(the Hashemite Kingdom of Jordan)으로 바꾸었다.

후세인-맥마흔 서신과 아랍인-영국의 관계 

1915년 7월 이집트 주재 영국 고등 판무관, 맥 마흔에게 보낸 서신(1915. 7.∼1916. 3)에서, 후세인은 ‘독립 아랍 정부’의 통치 지역이 아라비아반도, 팔레스타인,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맥 마흔은 전쟁 이후 아랍 독립에 대한 영국의 지지를 약속하였다.

그러나 맥마흔은 서신에서 팔레스타인이 어느 지역을 의미하는지를 고의로 불명확하게 표현한다. 대신 프랑스의 이해관계가 깊은 지역이라고 표현함으로써 뒤에 양자간에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영국은 고의로 불명확하게 표현함으로써 장래 아랍국가에서 팔레스타인을 제외시키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아랍측 대표인 후세인이 영국의 이러한 불명확한 내용에 굴복한 것은 칼리파직에 연연했기 때문이었다. 1915년 8월 30일자 맥마흔 서한에서 ‘영국 정부는 아랍인들이 칼리파직 수행하는 것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때문에 후세인은 장차 그 자신이 이슬람 세계의 정치, 군사의 최고 권력자인 칼리파에 취임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맥마흔-후세인 서한으로 독립 아랍 국가 건설 약속을 받은 후 1916년 6월 5일 후세인의 장남 알리가 메디나에서 봉기함으로써 반터키 항쟁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영국에 의해서 계획되고 추진되었다. 아랍인의 반터키 항쟁은 처음에는 강력한 터키군에 비하여 열세였으나 10월 이후 아라비아 로렌스(Thomas Edward Lawrence,1888-1935)가 가담하면서 메카와 젯다를 함락시켰고, 뒤이어 영․불과 연합 전선을 편 아랍 반란군은 영국군 및 로렌스의 지도와 파이잘의 지휘하에 홍해 연안에서 터키군의 통로를 막고 헤자즈 철도를 파괴한 후 팔레스타인 전선으로 북상하여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실제 주인공인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1888-1935)

이슬람 형제국 터키를 공격한 아랍인

1917년 6월에는 아카바 함락, 1918년 10월에는 다마스쿠스에 이어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다. 10월 30일 협상국과 터키간에 무드로스 휴전 조약에 체결되어 전 아랍 지역은 4세기간에 걸친 오스만의 통치를 무너뜨렸다. 중동 전선에서 연합국의 승리를 위해 함께 싸운 아랍측의 공적에 대해서 당시 연합군의 군사 해설자인 리델 하트 대위는 ‘한 번도 패배해 본 적이 없는 터키군을 완전히 격퇴한 것은 아랍인뿐이었다’고 찬양하였다.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 트레일러

1916년 사이크스 피코 협정과 1917년 밸푸어 선언에 의해서 아랍인들은 매우 놀랐으나 영국과 프랑스가 아랍인들의 약속을 존중할 것이라는 보증을 함으로써 후세인과 영국의 군사 동맹 작전을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또 1918년 1월4일 카이로 주재 영국 아랍 사무국 사령관이 호가스 메시지를 발표하여 아랍인과의 약속에 위배되지 않는 선에서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정착이 허용된다고 밝혔다.

이어 당시 이집트 주재 영국 고등 판무관 레지날드 윈게이트는 비밀 협정은 맺은 바가 없다고 해명하였다. 또 7인의 아랍 지도자들(1918년 카이로에서 결성된 시리아 통일당 지도자들)은 영국에게 아랍 국가의 장래에 대한 분명한 정책을 밝히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답하여 영국은 6월 16일 ‘7인에 대한 선언(The Declaration to the Seven)’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에 따르면, 협상국에 의해 해방된 지역인 이라크와 팔레스타인 지역에 수립된 정부는 ‘피지배자의 동의를 얻는 원칙’에 입각한다는 것이었다(계속).


* 이 글은 2009년 3월 ‘불교평론’에 실린 것으로 저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 원문 보기 http://goo.gl/WxccF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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