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혁명과 서방의 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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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은의 이란역사(5) – 호메이니와 이란이라크전쟁

 

아들 파흘라비(보통 ‘팔레비 국왕’으로 불리는) 즉위 뒤인 1941년 소련과 영국은 이란을 침공한다. 이란은 연합국의 병참기지가 되었고, 영국과 소련의 경제적 침탈도 심해졌다. 소련군은 2차대전 종전 후에도 가장 늦게까지 이란에 주둔했으며 이를 배경으로 이란 공산당인 투데당 Tudeh party이 세력을 불렸다.

반외세 민족주의를 내세운 모하마드 모사데그 Mohammad Mossadegh (위 그림)가 이끄는 국민전선이 약진을 보이자 1951년 국왕은 등 떼밀려 그를 총리에 임명한다. 모사데그 총리는 취임과 동시에 유전 국유화를 단행했다. 이란 유전을 꿰차고 있던 영국은 이란의 돈줄을 차단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모사데그가 투데당과 협력할 움직임을 보이자,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부까지 나서 군부 쿠데타를 사주한다. 모사데그는 반역 혐의로 체포된뒤 3년간 복역하고 고향에 가택연금됐으며 1967년 사망했다.

모사데그를 쫓아낸 샤는 친미, 친영 노선을 노골화하고 비밀경찰(SAVAK)을 동원해 반대파를 탄압했다. BP, 더치 셸 같은 서방 석유회사들이 이란의 유전을 장악했다. 1955년에는 바그다드조약이 성립된다. 바그다드조약기구(중동조약기구 METO)는 터키·이라크·이란·파키스탄·영국으로 구성된 상호방위동맹으로, ‘가맹국의 안전을 위한 협력’을 목적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소련의 중동진출을 막기 위해 결성된 것이었다. 회원국이 아닌 옵서버 자격으로 참가한 미국이 이 기구를 좌지우지했다. 1958년 이라크가 바트당 혁명 뒤 탈퇴하면서 이 기구는 해체되고 소련에 맞선 군사조약기구인 중앙조약기구(CENTO)가 만들어진다.

METO에 반강제적으로 가입한데 이어 국왕은 1959년 미국과 방위조약을 체결, 미군 주둔을 허용한다. 1963년 파흘라비는 6개항의 개혁조치를 국민투표에 부쳐 이른바 ‘백색혁명’을 시작했다. 주내용은 토지개혁, 근로자에 회사 이윤 분배, 삼림과 목초지 국유화, 국영사업장 매각, 노동자 농민에 유리하게 선거법 개정, 문맹퇴치 지원 등이었으며 여성에게도 투표권을 부여했다. 특히 역점을 두어 추진하였던 토지개혁은 아버지 레자 샤 시절 무산됐던 것으로, 파흘라비 국왕이 솔선해서 왕실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하기도 했다.

하지만 토지소유자와 겹치는 이슬람 성직자층은 이 조치에 크게 반발한다. 이들은 호메이니의 지도 아래 반(反)백색혁명 운동을 벌였다. 호메이니는 가택연금 됐다가 이듬해 터키(뒤에는 이라크)로 망명했다.

성직자들의 반대 속에서도 토지개혁은 진행됐고, 경제도 나아졌다. 국정에 자신감이 생긴 파흘라비는 1967년 10월 오랫동안 미루어 왔던 대관식을 치르고 1971년에는 페르샤 제국 창건 2,500주년 기념식을 페르세폴리스에서 성대히 거행하기도 했다.

페르세폴리스에서 1971년에 열린 페르시아 창건 2500주년 기념식

내정이 안정되자 그는 중동의 경찰 역을 자임하고 군비 강화에 나섰다. 내용은 실상 미제 무기 수입이었다. 국민들은 이런 친미노선에 굴욕감을 느꼈고, 이슬람 전통을 무시한 서구화 정책에 반감을 가졌다.

1979년 이슬람혁명 이전에 노엄 촘스키가 쓴 글을 보면, 이란이 당시 중동에서 지금의 이스라엘과 같은 역할, 즉 ‘미국의 경비견 노릇’(이건 내 말이 아니라 이스라엘 어느 총리의 표현이다)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모사데그 국민전선의 한 분파인 이란자유운동, 아야툴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슬람세력, 페다인과 무자헤딘 등 무장단체들이 모두 반 파흘라비 전선에 나서기 시작했다. 반왕정 운동은 점차 조직화되어갔다.

과시성 사업과 군비 강화에 예산을 낭비한 결과, 이란 경제는 1976년 후반부터 눈에 띄게 악화되기 시작했다. 왕정의 무능과 부패 속에 빈부격차는 오히려 커졌다. 전반적으로 파흘라비의 ‘백색테러’ 통치는 너무나도 잔혹했고, 온 국민을 공포로 몰아갔고, 재정을 엄청나게 탕진했고, 이란을 빈사상태로 몰아갔다.

1977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지미 카터는 그간 묵인해왔던 왕정의 인권탄압에 우려를 표하고 개선을 요구한다. 그러던 차에 78년 왕정은 호메이니를 음해하는 기사를 친정부 신문에 게재, 국민을 자극하고 쿰 시에서 열린 신학생 데모를 유혈진압한다. 이스파한의 바자르가 항의표시로 철시하고 시위에 나서자 다시 무자비하게 해산하는 등 78년 벽두부터 시위와 유혈진압의 악순환이 시작됐다.

8월 아바단에서 시위군중이 경찰을 피해 들어간 렉스 시네마에 불이 나서 400여명이 숨지는데, 훗날 조사에서는 광신도의 방화로 밝혀졌지만 당시에는 누구나 비밀경찰의 소행으로 믿었다. 9월 성난 군중이 테헤란 시내 잘레흐 광장에 운집하자 경찰이 무차별 발포, 유혈극이 벌어졌다.

이라크는 이란의 압력에 따라 호메이니(위 사진)를 추방했으며 호메이니는 프랑스 파리로 망명해간다. 그의 프랑스 망명은 오히려 이란 반정부운동이 국제적 주목을 받게 하는 계기가 됐다. 12월 파흘라비 국왕은 온건파인 국민전선 지도자 바크티아르 Bakhtiar와 협상, 바크티아르에게 총리직을 맡기고 출국하기로 결정한다. 이듬해 1월 파흘라비는 이란을 떠났다.

그러나 79년 출범한 바크티아르 정부에 대해 호메이니는 ‘불법’임을 선언하고 타도령을 내린다. 2월 1일 호메이니 귀국. 군부마저 호메이니 지지로 돌아서자 바크티아르마저 망명해버리고 2월12일 왕정은 완전히 종식됐다. 이것이 이란 이슬람혁명이다.

1979년 2월 5일 호메이니는 메흐디 바르자간 Mehdi Bazargan을 임시정부 수반으로 지명한다. 하지만 이슬람최고혁명위원회가 사실상의 정부였고, 정규군과 별도로 이슬람혁명수비대가 만들어져 무력으로 뒷받침했다. 12월에는 이슬람공화국을 표방한 새로운 헌법이 채택됐다.

테헤란 주재 미대사관 인질사건(11. 4.)이 없었더라도 미국은 이란을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이다. 왈러스틴과 헌팅턴의 책을 읽으면서, 생각했던 것보다 미국이 느낀 ‘체제 충격’이 어마어마하게 컸다는 사실에 좀 놀랐었다. 아무튼 인질사건으로 바자르간은 사임했다.

1980년 1월 바니 사드르 Bani Sadr가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됐지만 혁명세력을 누르지 못했다. 사드르는 1년만에 실각해하고, 무자헤딘(MKO) 지도자 마수드 라자비 Masoud Rajabi와 함께 81년 7월 파리로 망명했다. 사드르는 파리에서 호메이니 축출 운동을 전개했지만 이란의 권력투쟁은 승패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성직자 계급의 승리 이후 이란은 교조주의로 치닫는 동시에, 정정불안과 암살이 횡행한다. 사드르 실각 뒤 취임한 알리 라자이 대통령과 자베드 바호나르 총리가 나란히 암살됐다. 혁명위원회는 분쟁을 잠재우기 위해 저항조직을 해체하고 3000여명을 처형했다. 81년말 혁명은 초기의 불안단계를 극복하고 제도적으로 완성되었다. 

여기서 사담 후세인이 등장한다. 이라크는 인구의 65%가 시아파이고, 시아파의 종주국은 이란이다. 이슬람국가들 중에서 시아파 인구가 많은 나라는 이 둘 뿐이다. 후세인은 이란 혁명의 파고가 넘어올까 두려워 선제공격을 해버린다. 주변 아랍국가들의 명시적, 암묵적인 지지 속에 80년 7월 이란-이라크 전쟁이 시작됐다. 표면적인 이유는 Shatt al-Arab 수로의 영유권 다툼이었다.

이란-이라크 전쟁 기간 동안 16~17세가 대부분이었던 소년 병사만 9만 5,000명의 사상자를 냈다(위키피디아)

개전 후부터 1982년 여름까지는 이라크가 공격의 주도권을 잡았으나 1982년말부터 이란이 초기의 열세를 극복하고 반격에 나서면서 지리한 소모전에 돌입한다. 미국 무기로 무장하고서도 미국의 이라크 지원사격으로 고립지경에 빠진 이란은 국민들의 ‘혁명 수호 의지’로 패전을 면할 수 있었지만 인명피해는 이란 쪽이 훨씬 컸다. 그러나 외적의 침입으로 오히려 이란 내에서는 혁명 분위기가 공고해지는 효과가 있었다.

전쟁이 89년 9월 UN 중재끝에 종료되고 호메이니도 사망(1989년 6월)했다. 지금은 호메이니의 뒤를 이은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아래 사진)가 최고지도자로 군림하고 있다. 핵 개발 의혹을 둘러싼 서방의 공세와 경제제재, 개혁파-보수파 정권이 교대로 집권하면서 벌어지는 내부의 정치적 갈등 등이 이란을 어디로 끌고갈지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끝).

■ 왕조사 연표

고대 페르시아 왕조(B.C. 559-330)
사산 왕조(A.D. 226-651)
아랍의 지배(651-1258)
몽고의 지배(1256-1349)
티무르 왕조(1369-1500)
사파비 왕조(1501-1736)
아프샤르 왕조(1736-1749)
카자르 왕조(1796-1925)
파흘라비 왕조(1925-1979)
이란 이슬람공화국(1979-)

■ 근대정치사 연표

1906년 입헌군주국 수립, 샤 통치 종식
1919년 페르시아조약 -영국 보호령이 됨
1921년 레자 칸의 쿠데타
1925년 카자르 왕조 멸망, 파흘라비 왕조 건국
1935년 이란(Iran)으로 국호 변경
1941년 모하마드 레자 파흘라비 즉위(9월)
1951년 모사데그 정권 수립
1953년 모사데그 실각
1962년 백색혁명 시작(1월)
1963년 호메이니 망명(6월)
1977년 재미 유학생 반정부시위(11월)
1978년 반정부 시위 전국 확산(3월)
1979년 파흘라비 망명, 호메이니 귀국(2/1), 이슬람공화국 선포(4월), 미대사관 인질사건(11월)
1980년 바니 사드르 대통령 당선(1/25), 이란-이라크전쟁 발발(9/21)
1986년 미국 관리 비밀 방문(이란-콘트라 스캔들)
1988년 이라크와 휴전협정 체결(8/20)
1989년 호메이니 사망(6/3)
1993년 라프산자니 제6대 대통령 취임(8/4)
1997년 하타미 대통령 당선(5월)
2001년 하타미 대통령 재선(6월)
2005년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 취임(8월)
2009년 아마디네자드 재선, 반정부 시위와 유혈사태(6월)
2013년 중도온건파 하산 로하니 대통령 당선(8월 취임)


* 이 글은 경향신문 구정은 기자의 블로그에 올라온 것으로 저자의 허락을 받아 여기에 게재합니다. 원문 주소는 http://ttalgi21.khan.kr/3254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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