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에 망명한 천재음악가 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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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욱의 카자흐스탄 편지(4) – 평생 조국을 그리워한 음악가 정추

 

정추 선생의 장례식장에서 돌아온 후 내 컴퓨터 속에 있던 고인의 사진들을 정리했다. 어떤 사진들은 고인에게 전해졌고, 또 그렇지 못하고 컴퓨터에서 저장되어 있던 사진들도 있었다. 그 중 4년전 그의 생일잔치 때 찍은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그러니까 2009년 12월 26일 알마티 시내의 모 식당에서 열린 고인의 조촐한 86회째 생일잔치 사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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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회 생일을 맞아 알마티의 한 식당에서

이날 그는 EBS 방송을 통해 자신에 대한 다큐 프로그램이 방송된다는 말씀을 하시며,  “이 방송이 나가면 카자흐스탄에서 보다 한국에서 더 유명해지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며 농담을 하기도 했다. 이날 그는 카자흐스탄에서 망향가를 부르는 늙은이로서의 삶의 출발점인 모스크바 유학시절과 카자흐스탄에 정착하게 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김일성에 의해 선발된 모스크바 유학생들 – 10진(眞)

고인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전선으로 끌려가 총알받이가 되던 친구들과 달리 모스크바 국립영화학교와 음악대학 등에서 유학을 할 수 있는 특혜를 받았다. 그런 그에게 망명을 결정할 당시 갈등은 없었는지 묻자, “무사히 유학을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갔으면 오늘의 정추는 아마 없었을 것”이라며 “대신 북한에서 잘 나가는 음악가 또는 당 간부가 되어 있었겠지…..” 라고 말하던 모습이 생생히 기억이 난다.

그때 함께 행동을 한 유학생들에 대해서 그는 “허진, 최국인, 김종훈, 한진, 이경진, 이진환, 정인구, 최선옥, 양원식과 정추”라고 단숨에 동료들의 이름을 나열했다.

“우리들은 당시 북한 사회주의 정권의 토대구축을 위한 대민 교양사업의 중요한 수단이었던 공연예술과 영화를 전공한 학생들로서 주로 모스크바 국립영화학교와 음악대학 등지에서 유학을 했었지. 나중에 항일독립운동가 왕산 허위 선생의 종손인 허진 선생의 제안에 따라 각자의 이름에 진리 진(眞)자를 넣어 이름을 짓고 자신들을 10진(眞)이라고 부르며 영원히 진리를 추구키로 다짐하기도 했었지.”

1960년 알마티에서 연주하는 정추

그러나 이후 그들 앞에는 망명객으로서의 고단한 삶이 놓여졌고, 또 소련시민으로서 살아가던 고려인 동포사회나 현지 사회에도 끼여 들지 못하는 ‘경계인’으로서의 삶이 강요되었다. 이런 와중에 카자흐스탄에 정착한 이들은 70년대가 되어서야 무국적자의 설움을 씯고 카자흐스탄 국적을 받게 된다. 고인도 이때부터 비로소 본격적인 창작활동에 돌입하게 된다.

1961년 유리 가가린의 첫 우주선 발사현장에서 그의 곡이 연주

당시 고려인 동포사회는 구소련 소수민족들 중 모국어 상실의 속도가 가장 빠른 소수민족이었고 이는 동포문화단체에서 일할 수 있는 인력의 부족을 가져왔다. 이런 상황은 완벽한 모국어와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고인에게 ‘끼’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고인은 고려일보와 고려극장 등 동포 문화단체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작곡가 차이코프스키의 직계 4대 제자로서 구소련과 카자흐공화국 작곡가 동맹의 이사로 활동하며 수많은 곡을 작곡하였다. 1961년 가가린의 첫 우주선발사현장에서 그의 곡이 연주되었고 카자흐스탄 음악교과서에 무려 60곡, 피아노 교과서에는 20여 곡이 올라 있을 정도이다. 이런 그의 활동을 인정한 카자흐스탄 정부는 그에게 카자흐공화국 ‘공훈문화일군’ 명예칭호를 부여했고, 조국으로부터 KBS재외동포상, 국민훈장 ‘동백장’ 등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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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고인은 모국어를 상실한 동포사회에 새로운 문화적 자양분을 공급하였고 운명하시기 직전까지도 소년과 같은 순수한 호기심과 왕성한 창작욕을 가지고 계셨다. 외계인의 존재를 믿고 그들과 대화를 시도하는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북의 통일을 기원하며 북한 관련 기사와 정보는 지금까지도 꼼꼼히 챙겨 읽고 있다”고 밝힐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조국이 통일되는 날 ‘조국 교향곡’이 연주되는 게 소원

1923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나 광주고보를 다니던 중 일본인 교관과 싸우다 퇴학을 당한 후 평양과 모스크바를 거쳐 알마티에 정착했던 노 망명객 정추. 그에게 한국으로의 영주 귀국은 어떤 의미였을까?

“아동 음악가로 활동하고 있는 친동생 정근이가 서울에 살고 있어요. 그리고 제 호적도 아직 아직 살아있어요.  한국 국민인 셈이죠. 그러나 이 나이에 한국에서 산다는 게 자신이 없긴 합니다.”

이 말씀에서 짙은 여운이 느껴졌다. 20대에 떠난 조국을 죽는 순간까지도 그리워하는 비극적 인생의 주인공을 탄생시킨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정추 선생의 사진들을 정리하면서 그의 음악적 업적보다 현대사의 격랑속에서 살아온 정추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서 20세기에 엉켜버린 역사의 꼬인 실타래를 아직도 풀지 못하고 있는 분단조국을 발견했다. 특히 한국전쟁 종전 60주년을 맞는 올해,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음악으로 승화시켜 주옥 같은 많은 곡을 쓴 그의 음악적 업적과 함께 그를 그렇게 만든 조국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볼 필요가 있음을 느겼다.

조국이 통일되는 그날 ‘조국 교향곡’이 연주되길 간절히 바라는 정 추 선생의 소원이 꼭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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