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파비 왕조 전성기를 이끈 압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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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은의 이란역사(3) – 압바스, 셀주크 투르크, 사파비 왕조

 

중세시대의 이스파한

아랍 지배 뒤에도 이란인들이 관료로 많이 등용됐고 교육, 철학, 문학, 법학, 의학 등 학문 발달에도 크게 기여했다. 아랍어가 공식언어가 됐지만 이란의 민중들은 페르샤어(파르시)를 지켰다. 특히 샤나메를 비롯한 페르샤의 서사시는 유명하다. 파르시에서 파생된 말들은 인도는 물론이고 아프간을 비롯해 ‘-스탄’으로 끝나는 대부분 나라들에서 오늘날에도 쓰이고 있다.

압바스 왕조는 9세기 무렵부터 투르크 전사들을 용병으로 불러모았다. 왕조가 쇠하자 칼리프는 상징적인 종교지도자로 전락하고, 투르크 전사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중 돋보이는 것은 셀주크 투르크(1037-1220)다. 이들은 오늘날의 아프간 지역, 즉 이란의 동쪽에서 출발해 서쪽으로 이란을 장악했다. 이스파한을 중심으로 밑으로는 인도, 서쪽으로는 이라크와 시리아에 이르는 땅이 아랍족에 이어 다시 투르크족의 지배를 받게 됐다.

당시 셀주크에 저항했던 이들이, 테란 근교 알무트에 근거지를 뒀던 ‘이스마일 암살단’이다. 이들은 알무트 일대를 장악하고 셀주크 왕조의 주요 인사들을 암살했는데, 이들이 해시시를 흡입했다는 데에서 영어 단어 ‘암살 assassin’이란 말이 나왔다고 한다. 훗날 이들의 존재는 시아파 무슬림, 즉 이란인들의 폭력성을 강조하는 사례로 악용되기도 하니 씁쓸할 뿐이다.

셀주크 투르크는 1219년 몽골족에게 무너진다. 칸의 후예들은 페르샤 전역을 황폐화했다. 후세 입장에서 보자면 대규모 학살보다 더 안타까운 것이 문화유산의 파괴다. 칭기즈의 손자 훌라구 칸은 이란 땅에 일한국을 세웠는데, 가잔 Ghazan 칸 치세(1295-1304) 에 다시 역내 부흥이 이뤄진다. 그러나 1335년 아부 사이드 Abu Said 왕이 숨진 뒤 한국은 결국 사분오열한다.

이란 북동부에서 칭기즈의 후예들 중 강성했던 티무르가 제국 건설에 나선다. 티무르는 1381년 이란을 침공하고 북인도, 서역, 소아시아에 이르는 제국을 세웠다. 페르샤 천년 고도 시라즈와 이스파한은 다시 초토화됐다. 티무르 제국은 1405년 티무르 사후 급속히 쇠퇴했고, 1501년까지 간신히 명맥을 유지했다.

티무르

티무르 치하의 이란 북서부에는 사피 알 딘이라는 이슬람 셰이크(이슬람에는 원래 성직자 혹은 사제 개념이 없기 때문에 정확히 옮기기 힘들다)가 추종집단을 거느리고 살고 있었다. 당시 이단으로 배척받던 쉬아파들인 이들은 순니파의 탄압을 피해 은둔생활을 해왔다. 1499년 이 집단의 지배권을 장악한 이스마일이 정복전쟁을 일으킨다. 이스마일은 곧 이란 전역을 통일하고, 1501년 타브리즈 Tabriz 를 수도로 사파비 왕조 Safavid(1501-1736)를 수립한다.

이로써 이란은 652년 아랍족 침입 이후 1,000년 만에 이민족의 지배를 벗어난다. 오랜 이민족 통치로 이란인들은 반외세 심리와 이방인에 대한 환대라는 상반되는 의식구조를 갖게 됐다는 분석도 있고, 또 오랜 전제군주정과 외세 통치로 인해 절대권력에 굴종하는 공포심리가 체질화됐다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적어도 이란은 지리적인 틀에서 이란고원이라는 땅 안에 언제나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슬람학자들은 이란이 외세의 지배를 받기는 했지만 ‘결코 땅과 나라 이름을 잃은 적은 없었다’고 말한다.

이스마일은 쉬아 이슬람을 국교로 정하고 순니파들을 강제 개종시켰다. 쉬아 이슬람이 국교가 된 것은 이민족의 천년 지배를 끝낸 것보다도 현대 이란의 역사에 더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 됐다.사파비 왕조는 초기 신정체제를 구축했다. 이스마일이 모든 권력을 갖고, 성직자와 관료, 군이 3대 권력집단으로 샤를 에워싸는 체제였다.

어쨌건 쉬아는 이단(이것도 역시나 이슬람에는 없는 개념인데, 일단 ‘소수파’라는 의미로 해석하자)이었다. 오스만 투르크(영어로는 오토만 제국, 오늘날의 터키)가 이단을 처벌한다며 1524년 이란을 침공해 타브리즈를 함락시킨다. 아마도 투르크는 유럽의 십자군 전쟁에서 이단 전쟁의 논리를 배운 듯 -_- 이란군이 반격에 나서긴 했지만 사파비 왕조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오스만은 1533년 이라크를 점령해버리고, 아제르바이잔과 코카서스 지배권을 놓고 사파비 왕조를 두고두고 위협한다.

사파비 왕조의 전성기는 샤 압바스 Shah Abbas(1587-1629) 때였다.

이란 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존경받는 인물인 압바스는 이스마일의 증손자다. 선대 왕인 이스마일 2세는 자기 아버지한테 10년간 유배됐다가 탈출해서 정권을 장악했는데, 왕이 된 뒤에 형인 무하마드 호다반데 Mohammad Khodabande만 남기고 친족은 물론 아비의 신하들까지 모두 도륙해버린다. 공포정치에 질린 근위대가 호다반데를 옹립하는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발각됐고, 압바스의 형 헤이다르마저 반란군을 이끌다 전사한다.

압바스는 10살 어린 나이에 반란군 지도자로 추대된다. 작은아버지에 맞서 왕위를 차지하기까지 압바스의 드라마는 ‘용의 눈물’ 같은 영웅신화 겸 전쟁이야기다. ‘타고난 군사전략가’인 압바스는 일단 ‘적의 적’인 오스만과 강화를 맺어 국경분쟁을 일단락 지은뒤 동쪽 우즈벡을 격퇴시킨다.

그리고는 – 오스만과의 전쟁이다. 이라크, 그루지야, 코카서스를 탈환해 버린다. 정치적으로는 개혁가였다. 사제들과 귀족들의 사병(私兵)을 혁파하고 관료제를 강화하여 중앙집권제를 공고히 했다 – 마치 왕건의 행로처럼, 그는 왕조의 창시자처럼 개혁을 강행한다. 그 덕에 정교 분리가 이뤄지기 시작했고, 종교에 독립적인 위계질서가 만들어졌다.

이란은 다시 동서양 교역중심지로 발달하기 시작한다. 전국 도시를 잇는 도로망과 숙박시설을 만들어 안전을 보장하고 비단 무역을 독점, 국가재정을 확충한다. 압바스는 바레인과 호르무즈 해협 섬들을 점령하고 인도양의 포르투갈 세력을 격퇴한다.

‘전성기’를 얘기하려면 문화가 빠질 수는 없다. 압바스는 심지어 ‘계몽군주’였다고 한다. 예술을 장려해 건축과 회화 등 페르시아 예술과 문화를 부흥시켰다. 이스파한을 새 수도로 정하고 사원과 궁전, 학교, 다리 등을 지어 세상의 절반(Nesf-e Jahan)이라 불릴 정도였다.

이란인들은 이스파한을 ‘이란의 심장’이라 하고, 수도인 테헤란은 ‘이란의 영혼’ 즉 머리라고 한다. 얼마전에 지진으로 폐허가 된 밤 Bam을 가리켜서 외신들이 페르샤의 보석이니 에메랄드이니 했는데 사실 이란에서 밤은 대표적인 유적지는 아니다. 이란에서 가장 유명한 곳들(그러니까 관광지들)이라고 한다면 테헤란, 이스파한, 쉬라즈, 파브리즈라고.

샤 압바스의 프레스코화

압바스 2세(1642-1666) 통치기 뒤로 사파비 왕조는 내리막을 걷는다. 어떤 이는 압바스 2세를 영조에 비유한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굶겨죽인 것처럼, 압바스 2세는 아들이 역모를 꾀했다고 의심해서 처형해버린다. 손자 사피 1세가 뒤를 잇지만, 아비의 죽음으로 비뚤어진 이 왕은 공포정치로 살육전을 일삼는다(이건 정조와 다르다).

나라가 부실해진 틈을 타서 아프간이 쳐들어온다. 1722년 아프간의 부족장 마흐무드 Mahmud가 이스파한을 함락하고 마흐무드 1세로 즉위한다. 폐위된 술탄 후세인 왕의 아들이 신흥군벌 나데르의 힘을 빌어 왕위를 되찾긴 했지만, 이번에는 나데르가 반역을 일으켜 스스로 왕이 되어버린다. 사파비 왕조의 종말이다. 나데르는 초반 피치를 올리다 1747년 암살됐다. 이후 아프샤르, 잔드, 카자르 등 여러 왕조가 부침하는 혼란기가 이어진다(계속).


* 이 글은 경향신문 구정은 기자의 블로그에 올라온 것으로 저자의 허락을 받아 여기에 게재합니다. 원문 주소는 http://ttalgi21.khan.kr/3254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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