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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아랍과 이란은 뿌리도 언어도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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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은의 이란역사 이야기(2) – 파르티아, 사산조, 아랍의 지배

 

알렉산드로스가 바빌론 땅에서 후계자 없이 사망한 뒤 광대한 영토는 휘하 장군 4명이 나눠 가졌다. 그들 중 이란을 지배했던 것은 셀레우쿠스 Seleucus 장군이었다. 셀레우쿠스와 그 후손들이 이끈 왕조를 셀레우쿠스 seleucid 왕조(B.C. 312-B.C. 247)라고 부른다.

그러나 셀레우쿠스 왕조는 지배구조를 만들기도 전에 반란에 시달렸다. 현재의 타지키스탄 지역인 Fars 지방(Farsi, 즉 페르샤어의 어원이 됐던)에서는 半유목민인 파르티아족(이란족과 스키타이족의 혼혈)이 셀레우쿠스 왕조를 무너뜨리고 파르티아 왕조(B.C.247-A.D. 224)를 세웠다. 반란 지도자 아르사케스 Arsaces의 이름을 따서 아르사케스 Arsacid 왕조라고도 한다.

파르티아 왕조는 미트라다테스 Mithradates 2세(B.C.123-87) 때 세력을 확장해 인도와 아르메니아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장악, 로마제국과 상대했다. 실크로드를 따라 이란의 직물(페르샤 카펫)이 동서양을 오갔다. 지배층은 조로아스터교를 숭배했지만 대중들에게까지 퍼지지는 못했다고 한다.

파르티아는 주변국들에 비하면 신분 이동의 통로가 열려 있는 비교적 개방된 사회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파르티아족의 출신지인 파르타브 Parthav 지방의 언어인 파흘라비 Pahlavi가 공용어로 사용됐는데, 1979년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으로 붕괴된 파흘라비(팔레비) 왕조는 여기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파르티아가 500년 가까이 존속됐음에도 불구하고 뒤이은 사산 Sassan 왕조(224-652. 교과서에는 ‘사산조 페르시아’ 라고 나왔던)가 조직적으로 전대의 유산을 파괴했기 때문에 역사 복원이 잘 되고 있지 않다는 점.

사산은 이란의 전설적인 영웅이다. 파르티아를 무너뜨린 아르다쉬르는 스스로를 사산의 후계자라고 칭했기 때문에 그의 왕조에 ‘사산조’라는 이름이 붙었다.

아르다쉬르는 집권 뒤 파르티아 말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지방 귀족들을 통제, 전국을 12개 주로 나눈 중앙집권체제를 만든다. 조로아스터 신관의 아들이었던 그는 조로아스터를 국교로 지정했고 정교 일치의 강력한 집권체제를 추구했다. 아들 샤푸르 Shapur 1세는 그러나 종교에 지나치게 심취해 승려들에게 정치를 맡기는 우를 범한다.

폭군 아자르 나르시의 시대를 지나 사산조의 10대 왕인 샤푸르 2세 Shapur II 가 즉위한다. ‘샤푸르 대왕’이라고 불리는 이 왕은 어머니 뱃속에서 즉위, 상당기간 섭정을 거쳤다. 70년 재위하면서 주변국들을 복속시키고 승려들의 특권을 없애 왕권을 강화했다. 샤푸르 2세에서부터 바흐란 5세, 카바드 1세 등으로 이어지는 기간은 사산조의 전성기였다. 페르샤는 정치사회적, 경제적으로 크게 부흥해, 뒷날 아랍인들에게 멸망하기까지 ‘르네상스’를 맞는다. 

샤푸르 대왕

사산조 하면, 로마와의 싸움을 빼놓을 수 없다. 로마와 갈등했던 이유는 아르메니아 지배권 문제였다고 하는데, 아르메니아는 지금도 이슬람권에 둘러쌓인 기독교국가로 남아 있다. 옛 소련에서 갈라져 나온 나라들 중에서 유일하게 제법 자본주의적인 변신을 했는가 하면, 유대인에 버금가는 ‘로비 능력’으로 미국 내에서도 말빨 센 이민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로버트 카플란은 밉살스런 저작 <타타르로 가는 길>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의 ‘이란 공포증’에 대해 說을 풀었는데, 양국의 역사가 오랜 만큼 적대심도 깊은가 보다. (아르메니아는 근대 들어와 터키(오스만 투르크)에서도 숱하게 학살됐으니 悲願의 민족이긴 하다.) 하지만 사산조는 파르티아에 대면 신분 이동이 제한돼 있었지만 그래도 기독교도가 특별히 박해받지는 않았다고 한다. 아르메니아를 둘러싼 사산과 로마의 싸움은 역시나 ‘양대 제국의 패권 싸움’으로 봐야 할 듯.

사산조의 수도는 바그다드 근처에 있는 크테시폰인데, 당시에 이미 200만명의 인구를 자랑하던 대도시였단다. 몇해 전에 크테시폰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들르지 못했던 것이 아쉽다.

The Arch of Ctesiphon

크테시폰 유적

크테시폰은 바그다드의 건립자 아부 자파르 알 만수르(압바스 왕조의 2대 칼리프)에 의해 파괴됐고 크테시폰의 건축물들은 바그다드의 건축자재로 이용됐다고 하니. 바그다드 시내에는 알 만수르의 거대한 頭像이 세워져 있는데 머리만 올려놓은 것이라 아주 강한 인상을 준다. 2002년 3월 미군이 바그다드를 공격하는 것을 보면서 바그다드 시내에 있던 만수르의 두상을 생각했었다. 부수고 짓고 또 부수는 것이 인류의 ‘문명’인가. 

이제 고대 세계를 지나, 중세 이란으로 넘아가보자.

아랍족은 이란의 아리안들에게 ‘눌려 살던’ 민족이었다(종족 구분이라기보다는 사실 언어에 따른 구분에 가깝지만). 그런 아랍족이 ‘大페르샤’를 제치고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등장 이후였다.

보통 이란을 아랍국으로들 알고 있지만 아랍과 이란은 뿌리도 언어도 다르다. 비슷한 점이라면 같은 이슬람을 믿는다는 점,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점 정도다. 이란은 이란이고 아랍은 아랍이다. 실제 아랍국들은 이란을 경외시 혹은 백안시한다.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 때 미국은 물론이고 사우디 같은 아랍국들도 모두 아랍 형제인 이라크를 지원했었다.

무함마드가 아라비아반도를 장악한 뒤 이슬람군대가 가장 먼저 전쟁을 건 대상도 바로 이란(페르샤)이었다. 무함마드 사후 초대 칼리프로 취임한 아부 바크르 Abu Bakr는 서쪽으로는 비잔틴, 동쪽으로는 사산조를 향해 정벌의 칼날을 돌린다. 650년 아랍군은 크테시폰을 점령하고, 이듬해에는 사산군을 대파하면서 이란 전역을 장악했다. 정통 칼리프朝(650-661)가 멸망한 뒤 이란에는 우마이야드 Umayyad 왕조(661-750)와 압바스 왕조(750-821)가 대를 이어받았다.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왼쪽)와 아부 바크르(오른쪽)

사산조의 후예인 다부예흐 Dabooyeh가 망국의 유민들을 모아서 작은 나라를 세우긴 했지만 페르샤의 후계자로 보기엔 미약하다(다만 이들은 이슬람 개종 후에도 독자적인 국가를 유지, 950년 간이나 지속됐다고 한다). 압바스 왕조 말기, 이란 땅에서는 반란이 줄을 잇는다. Saffarids, Samanids, Ghaznavids, Buyids 등 자잘한 왕조들이 명멸했던 시기(821-1055)를 Iranian Intermezzo라 부르기도 한다.

이슬람교 포교 과정에서 무슬림들이 보여준 관용은 잘 알려져 있다. 이란에서는 주로 도시거주민을 중심으로 개종이 급속히 진행됐다. 이란인의 개종이 빨랐던 것은, 지역적 역사적 종교적 속성 상 조로아스터교가 이슬람교와 유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유사했다기보다는 이슬람이 조로아스터의 여러 요인들을 흡수해 만들어졌다고 해야겠다).

몽골인들이 한족의 문화를 배운 것처럼, 이란을 정복한 아랍인들은 페르샤의 제도와 문화를 물려받았다. 특히 ‘제국’의 운영체제를 많이 배웠다. 버나드 루이스같은 서방 이슬람학자는 ‘이란은 처음부터 제국이었다’고 말하곤 한다. 고대 페르샤 시절부터 이란은 ‘제국’을 이끌어왔고, 전제군주에 익숙해 있다는 말이다. 루이스가 이런 얘기를 한 것은 호메이니 혁명 이후 이란을 헐뜯기 위해서였지만.

아무튼 이란의 군주인 샤 Shah 는 (루이스에 따르면) 이집트의 파라오, 중국의 황제와 비견되는 절대 군주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얼마전에 심심풀이로 읽다 만 페르도시 Ferdowsi(935- ?)의 유명한 서사시 ‘샤나메’ 영역본은 Shah 와 King을 구분하고 있다. 우리말로 옮기면 ‘황제’와 ‘군왕’ 쯤 될 터인데, 이란의 샤를 ‘왕중의 왕’이라 하는 것을 보면 당대 페르샤인들의 자부심이 중화사상 못지않았음을 볼 수 있다(계속).


* 이 글은 경향신문 구정은 기자의 블로그에 올라온 것으로 저자의 허락을 받아 여기에 게재합니다. 원문 주소는 http://ttalgi21.khan.kr/3254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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