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역사(1) – 이란인 조상은 아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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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은의 이란 역사 이야기(1) – 아리안, 그리고 크세르크세스

 

이란은 열사의 사막이 아니다. 걸프의 거대한 모래국가와 달리 이란은 기본적으로 사막이 아닌 ‘고원’으로 이뤄져 있다. 북쪽의 고원지대는 상당히 추워서 1년의 절반 동안 눈에 덮여 있는 곳들도 있다고 한다. 이란의 부자들은 이 고원지대에 스키를 타러 다닌다고 한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에 나오는 ‘추운 마을’들을 연상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이란, 아리안 

이 이란고원에 인류가 둥지를 튼 것은 아주 오랜 일이다. 페르샤라는 이름을 대체 언제부터 들어왔던가. 이란인의 직접적인 조상은 인도-유럽어족의 한 갈래인 아리안들이다. 이들이 고원에 들어온 것은 기원전 2500년 쯤으로 추정된다. 중앙아시아 초원에 살던 아리안들은 기원전 3000년-4000년 무렵에 이동해서 일부는 유럽에 들어가 게르만, 슬라브, 라틴의 원조가 되었고 일부는 남쪽의 고원에 정착해 이란인이 됐다고 한다.

더 밑으로, 더 남쪽으로 내려간 사람들은 인도아대륙에 진출해 원주민이던 드라비다인들을 제치고 현재의 인도인들의 조상이 됐다. (여담이지만 인도 남쪽에는 아직도 드라비다인들이 남아서 스리랑카에 사는 혈족들의 분리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다)

아리안은 이합집산을 거치는데 스키타이족(우리와도 연관이 있지요), 메디아족, 이란족(페르샤인들) 등이 모두 이 갈래다. 이란-이라크전은 1980년에 일어났지만 실은 이미 인류의 초창기에서부터 오늘날 이라크에 살던 사람들과 이란의 아리안들은 대립을 했었다.

초창기 이란의 아리안족들, 즉 이란족들은 당시 그 땅을 정복했던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나 바빌로니아에 맞서 싸우는 용병 노릇을 했다. 아리안들은 아주 용감했었는지, 곧 원주민들을 제치고 고원을 장악해 ‘이란’(아리안들의 땅)을 만들어버린다. 기원전 7세기 쯤, 이란인들의 일파인 메디아인들이 앗시리아에서 독립해 남부 이란과 소아시아에 걸쳐 메디아 왕국(B.C. 708 – B.C.550)을 세운다. 메디아는 이란인이 세운 최초의 왕조였지만 영토가 넓었던 대신 중앙집권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부족 연합체에 그쳤다고 한다.

이란 파사르가다에에 있는 키루스의 무덤

아리안이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한 것은 기원전 621년 메디아 왕국의 아스티아게스 왕 때다. 아스티아게스는 바빌론과 연합해 앗시리아를 무너뜨리고 메소포타미아 북부지역을 차지했다.

메디아는 티그리스-유프라테스 연안의 ‘비옥한 초승달’, 즉 오늘날의 이라크 땅을 차지하기 위해 바빌론에 맞섰으나 싸움은 패배로 끝났다. 바빌론의 나보니두스 왕은 이란 남부 아케메네스 Achaemenes 왕조 (B.C. 550-B.C. 330) 와 동맹을 맺어 메디아를 정벌해버렸다.

아케메네스는 우습게도, 아스티아게스의 외손자인 키루스 Cyrus 가 열어제낀 왕조다. 메디아는 외손자에게 뒤집어진 꼴이다. 아스티아게스는 앗시리아를 무너뜨리기 위해 바빌론과 손잡았다가 훗날 바빌론에 망했고, 키루스는 바빌론과 연합해 메디아를 무너뜨리더니 급기야는 바빌론에 칼을 돌렸다. 키루스는 주변 부족국가들을 통합해 동으로는 소아시아와 아르메니아, 서로는 힌두쿠시까지 세력을 확장했고 B.C. 539년 바빌로니아를 정벌한다. 한때의 동맹이던 나보니두스는 폐위됐다.

키루스는 아주 관대한 정책을 펼쳐 피정복민의 관습과 신앙을 지켜줬다. 오히려 피압박 민족들에게 ‘해방자’로 추앙됐다고 하는데, 바로 성경에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바빌로니아에 노예로 잡혀 있던 유태인들(‘바빌론 유수’)을 해방시켜준 것이 바로 이 왕이다. 구약 에스라서와 이사야서에는 ‘고레스 왕’으로 표기돼 있다. 키루스는 이란인들에게는 아주 위대한 왕, 너그럽고 지략 뛰어난 왕으로 각인돼 있다고 한다.

키루스 대왕은 이집트마저 정복하길 원했지만 당대에는 꿈을 이루지 못했다. 아버지의 소망을 이뤄준 것은 아들 캄뷰세스 2세. (어릴 적 읽었던 헤로도투스의 ‘역사’에서 익히 봤던 이름) 캄뷰세스 2세는 이집트를 정복하고 스스로 이집트 27왕조의 파라오가 된다. 그러나 왕이 이집트에 가 있는 동안 정작 이란에서는 쿠데타 기도와 혼란이 벌어졌고, 캄뷰세스 2세는 에티오피아 원정이 실패한 뒤 자살했다.

드디어 이 인물이 등장한다. 다리우스 1세. 

캄뷰세스 사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즉위한 다리우스 1세는 인도 북부에서 오늘날의 불가리아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헬레네스(그리스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이란(페르샤) 제국’의 시대가 온 것이다.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운하를 최초로 건설했다 하니, 수에즈 운하의 원형이 그 옛날에 만들어졌던 셈이다.

그리스인들은 이 거대제국을 페르샤라고 불렀는데, 파르시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란 얘기다. 이란어를 파르시라고 한다. 그러니 ‘이란 제국’이 맞는 말이지만 지금은 페르샤가 일반화된 용어로 자리를 잡았다. 메디아를 필두로 줄줄이 이어진 왕국들을 모두 ‘페르샤’라 하고, 메디아 왕조, 아케메나스 왕조 식으로 ‘왕조’를 붙여 구분하니 뿌리는 다 똑같다.

다리우스 대왕의 부조

페르샤에 정복된 그리스 식민도시들은 밀레투스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아테네가 여기 껴들어서 전쟁이 난다. 다리우스 1세가 쳐들어온다! 3차에 걸친 전쟁이 벌어진다.

다리우스의 1차 원정은 폭풍으로 실패했고, 2차 원정에서는 유명한 ‘마라톤 전투’로 퇴각한다. 그런데 헤로도투스는 마라톤 전투를 대서특필했지만 허풍이 심했던 모양이다. 페르샤에서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지도 않았던 전투였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학자들은 헤로도투스의 기록이 당시 병력규모로 미뤄 과장돼 있을 소지가 높다고 지적한다.

다리우스 1세는 3차 원정을 준비하던 중에 숨졌다. 뒤를 이은 인물은 전임자 만큼이나 명성을 떨쳤던 크세르크세스(<아르미안의 네 딸들>에서 둘째 스와르다의 남편이었던 인물, 결국 스와르다를 목 잘라버리는 것으로 나온다. ‘스와르다’는 가상인물이지만 크세르크세스가 말 안 듣는 후궁의 목을 잘랐다는 기록은 실제로 있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다. 그러나 크세르크세스의 원정대도 살라미스 해협에서 아테네 해군에게 궤멸됨으로써 10여년에 걸친 원정을 실패한다. 전쟁의 패배, 결말은 ‘국력 쇠퇴’다. 피정복민들이 크세르크세스 사후 줄지어 반란을 일으키고 지배층은 분열됐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메디아와 달리 중앙집권체제와 사회경제적 토대를 갖춘 명실상부한 제국을 만들었다. 당시의 행정과 치안, 세금제도 등을 담은 상세한 기록들이 전해온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촘촘한 도로망과 국가가 운영하는 역마제도. 전국 어느 곳에건 보름 이내에 중앙정부의 뜻이 전달될 수 있었다고 한다. 제국의 수도인 수사에서 지금의 터키 북쪽 리디아 속주까지 고속도로^^;;가 연결돼 있었다고. 이 네트워크는, 속주들의 반란을 막는 안보시스템이기도 했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멸망한다(계속).


* 이 글은 경향신문 구정은 기자의 블로그에 올라온 것으로 저자의 허락을 받아 여기에 게재합니다. 원문 주소는 http://ttalgi21.khan.kr/3254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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