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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지단은 왜 박치기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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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7월 3일 천신만고 알제리 독립 그리고 하르키

피식민지를 경험한 국가 치고 ‘피 어린’ 투쟁과 ‘지난한’ 역사를 보유하지 않은 나라가 없지만 이 나라의 독립은 정말로 ‘천신만고’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오는 구절양장, 첩첩산중의 경로를 거친 결과였다. 알제리. 땅 넓이는 한반도의 열 한배에 달하는 넓은 나라이지만 인근의 프랑스 식민지였던 모로코와 튀니지와는 또 다른 역사를 지닌다. 허울 뿐이기는… 했으나 나라의 왕실이 존재했고, 독립적인 단위로서의 국가 형태를 지녔던 모로코와 튀니지와는 달리 알제리는 유목 사회가 대종을 이루는 사막국가로서 130년이 넘게 ‘아프리카의 식민지’ 아닌 그저 프랑스의 일부로 지내왔던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다보니 알제리에서 태어나고 뼈를 묻은 세대가 몇 세대에 이르렀다. 우리가 아는 작가 알베르 까뮈나 디자이너 입센 로랑, 철학자 알튀세 등이 알제리 출신이다. 피에 느와르(검은 발 – 알제리 출신 프랑스인) 집단은 대개 알제리에서 대부분의 특권을 소유했고, 알제리의 이슬람 교도들을 정치적 경제적으로 지배하면서도 자신들이 야만인들을 교화시키고 있다는 확신에 차 있었다.

더욱이 알제리가 프랑스로부터 떨어져 나간다는 것은 자기 다리 한쪽이 별안간 떨어지는 것만큼이나 말도 안된다고 믿었다. 심지어 프랑스식 교육을 받은 알제리의 식자층이나 상류층도 자신들을 프랑스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문제는 점차 알제리 인민들이 그 믿음에 동의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유럽 전선에도 투입되는 등 바깥 물을 먹고 들어온 알제리인들이 더 반항적이 됐다. 그들은 프랑스의 일부가 아닌 알제리인의 알제리를 원했고 프랑스 정부는 이에 탄압과 폭력으로 대답한다. 식민 통치를 한 국가 가운데 자애로움 같은 단어와 친했던 나라는 단 한 나라도 없지만 프랑스의 식민지 관리는 유달리 잔혹하기로 정평이 있다.

예를 들어 1945년 5월 8일 무슬림들이 폭동을 일으켜 100여명의 백인들이 살해당하자, 프랑스 민병대, 즉 피에 느와르들은 프랑스 정규군의 묵인 속에 4,000여명의 무슬림을 해치운다. 그리고 비율은 이후로도 대체로 지켜진다. 이에 자유 프랑스군의 특무상사 출신이었던 알제리인 벤 벨라를 중심으로 알제리 인민들은 민족해방전선을 결성했고, 1954년 11월 1일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이 프랑스군을 공격하면서 프랑스와 알제리 인민은 악몽 같고 늪 같고 진창 같고 뻘 같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갔다.

알제리전쟁

1954년 11월 1일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이 프랑스군을 공격하면서 프랑스와 알제리 인민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갔다. 8년 가까이 계속된 전쟁에서 알제리인 100만여명이 목숨을 잃었다(사진은 위키피디아).

사태는 복잡했다. 프랑스 정부가 있고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이 있었다. 그 둘의 대결만으로 전쟁을 설명할 수는 없다. 당장 앞서 언급한 알제리 출신의 프랑스인들, 자신의 조국은 알제리이며 동시에 프랑스인 백인들이 “조국”을 사수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고, 알제리 무슬림이기는 하되 프랑스 식민 통치 체제 하에서 복무한 ‘하르키’도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 통치를 싫어하되 딱히 프랑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도 없는 대중들도 있었다. 그 집단들은 서로 애매하게 맞물려 들어가면서 그야말로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을 재연하고 또 재연하게 된다.

언급했듯 프랑스도 무자비의 극단을 달렸고, 또 그에 맞선 해방전선 FNL은 프랑스에 협조하거나 자신들에 반하는 이들을 처단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하르키’들은 프랑스가 좋아서라기보다는 그 체제에 복무한 관성대로, 또 민족해방전선의 칼날에 베인 상처를 이유로 프랑스에 협조했다. 프랑스는 당연히 이들을 적극 활용했다.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자신의 자식들 피는 아끼고 다른 민족들에 대한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언제나 외국인의 피를 사용하고 있다.”고 비난한 민족해방전선의 말은 매우 타당했다.

전쟁의 참화와 프랑스의 만행이 알려지면서 국제여론과 프랑스 국내 여론은 변했다. 이미 현재의 한국군 수준의 병력이 알제리에서 작전 중이었고 그 전비를 감당할 수도 없었고 이길 가능성도 보이지 않았다. 드골은 처음에는 “프랑스의 알제리!”를 외쳤지만 이미 알제리를 포기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그가 본색을 드러내 알제리 민족해방전선과 협상에 들어가면서 알제리 내의 프랑스인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고 심지어 알제리 주둔 프랑스군이 반기를 들기도 했지만 장교들은 몰라도 사병들이 반란에 반대하여 반란이 며칠만에 사그라들었을만큼 대세는 기울어 있었다.

1962년 7월 3일 알제리는 감격의 독립을 선언한다. 하지만 그 순간이 악몽인 사람들도 많았다. 알제리의 프랑스인들도 그랬겠지만 그들은 악몽에서 깨어날 수가 있었다. 프랑스에 협력했던 하르키들은 그야말로 악몽 속에서 프레디에게 갈기갈기 찢기는 희생자로 전락한다. 프랑스는 그들을 위해 싸웠던 하르키들을 헌신짝처럼 버린 것이다. ‘프랑스의 알제리’를 위해 싸운다고 생각했지만 프랑스는 하르키들을 위해 털끝만큼도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무방비상태로 프랑스의 통제가 사라진 지역에 남았고 전쟁 기간 동안 100만 명이 희생된 알제리 인민의 복수의 칼의 표적이 된다. 초대 알제리 대통령 벤 밸리의 사면령에도 불구하고 15만 명의 하르키가 목숨을 잃는다.

그 살인의 파도를 겨우 벗어난 하르키 중 일부는 자신들이 목숨 바쳐 도왔던 프랑스로 왔지만 전우 대접은커녕 자신들과 싸웠던 민족해방전선에 보내는 것과 비슷한 경계의 눈초리를 받으며 여생을 보내야 했다. 아트 사커의 대명사 지네딘 지단이 바로 그 하르키의 후예다. 그의 삼촌은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 출전한 알제리 축구 대표선수였다.

Coup de tête de Adel Abdessemed

파리 퐁피두센터 앞에 세워진 지단 박치기 동상(Flickr)

독일 월드컵 결승전에서 지단이 이탈리아 수비수에게 어떤 폭언을 듣고 그를 머리로 들이받고 퇴장당했을 때, 그 폭언으로 추정된 것 중의 하나는 ‘하르키 배신자 자식’이었다고 한다. (가족에 대한 성폭력적 언사였다는 것이 정설이긴 하지만) 그때 알제리 대통령이 이렇게 지단을 위로한다. “지단에게 일어났던 일은 누구에게도 생길 수 있는 일이다. 우리가 할 일은 이를 심판하는 게 아니라 이해하는 것이다.” 그 아픈 역사에서는 매우 의미심장한 위로가 아니었을지.

얼마 전 어느 민족주의자의 입에서 이 알제리의 독립을 얘기하면서, 하르키들에 대한 훌륭한 ‘청산’을 예찬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프랑스의 나찌 관련 ‘과거청산’조차 몹시 경계해야 할 점이 많다고 여기는 바, 15만여명의 하르키들을 쓸어버린 알제리 인민들의 방식에도 절대로 동의하고 싶지 않다. 그들은 제국주의의 괴뢰였으되 희생자였고 주구였으되 볼모였고 프랑스인이 아니었으되 알제리인도 될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알제리의 독립일 하르키를 생각해 본다.


* 이 글은 김형민 선생의 ‘산하의 오역’ 중 한 대목으로 저자의 허락을 받고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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